투표를 하지 않는 자는 시민이기를 포기한다.
장자크 루소의 이 말은 정치적 참여를 시민의 핵심 책임으로 보는 그의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반면,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진정한 변화는 내면의 각성에서 온다”며 투표나 정치적 참여를 거부하고, 모든 체제를 “심리적 감옥”이라 비판했습니다. 두 사상가의 주장은 언뜻 상충되는 듯 보이지만, 각각의 철학은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루소는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사회계약을 유지하고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크리슈나무르티는 개인의 내면적 자유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과연 루소의 현실적 접근이 크리슈나무르티의 이상주의보다 더 설득력 있는 걸까요? 이번 글에서는 두 사상가의 철학을 비교하며, 특히 루소의 “시민” 개념과 크리슈나무르티의 탈정치적 태도가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루소, 투표와 시민의 책임
루소는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의 저서 사회계약론에서 그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사회를 형성한 이유는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자유가 단순히 개인의 독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실현된다고 보았습니다. 루소에게 “시민”이란 사회계약에 동참하며, 공동의 의지(general will)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말, “투표를 하지 않는 자는 시민이기를 포기한다”는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투표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사회계약의 일환으로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참여하는 시민의 책임입니다. 루소는 개인이 투표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다면, 결국 공동체의 의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개인이 자유를 포기하고, 타인의 결정에 자신을 맡기는 것과 다름없다고 여겼죠.
루소의 철학은 현실적입니다. 그는 인간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사회가 불완전하고, 정치가 때로는 타협과 갈등으로 얼룩질 수 있음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참여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이상은 이상주의적이지만, 그 실행은 철저히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투표, 토론, 법 제정 같은 구체적인 행동이 사회를 유지하고 개선하는 기반이라는 것이죠.
크리슈나무르티 - 탈정치와 내면의 혁명
반면, 크리슈나무르티는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는 국가, 이념, 조직을 “인간을 얽매는 심리적 감옥”이라 비판하며, 진정한 변화는 개인의 내면적 각성에서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말, “타인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나 자신부터 자유로워져라”는 개인의 의식 혁명을 강조합니다. 그는 투표나 정치적 참여를 거부했으며, 어떤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세계 곳곳에서 강연을 통해 이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그는 국가나 제도가 아니라, 개인의 깨달음이 세상을 바꿀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매력적입니다. 누가 외부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는 삶에 끌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주장은 현실에서 한계와 모순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크리슈나무르티가 안전하게 강연을 하고 세계를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인프라와 안보 체계 덕분이었습니다. 경찰의 보호, 여권과 비자 체계, 교통망 같은 시스템이 없었다면, 그의 강연은 테러나 강도의 위협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가 체제를 비판하며 “바깥에서” 산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체제의 안정성에 의존했습니다. 이는 그의 철학이 현실적 기반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루소 vs 크리슈나무르티, 누가 더 현실적인가?
루소와 크리슈나무르티의 철학은 인간의 자유와 사회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루소는 자유가 공동체의 참여를 통해 실현된다고 보았고,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유가 개인의 내면에서만 완성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둘의 접근을 비교했을 때, 루소의 철학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루소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사회의 복잡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정치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알았지만, 시민의 참여가 그 불완전성을 개선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투표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시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반면, 크리슈나무르티는 정치적 시스템을 전적으로 거부하며 내면의 변화만을 강조했지만, 그의 삶 자체가 그 시스템의 보호를 받았다는 점에서 모순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크리슈나무르티가 강연 중 테러나 공격의 위협 없이 안전하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안보 체계 덕분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완전히 체제 없는 세상에서 강연을 시도했다면, 그의 메시지는 전달되기도 전에 좌절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그의 철학이 현실적 실행 가능성을 간과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루소의 철학은 이런 점에서 더 현실적입니다. 그는 시민의 참여가 없으면 사회계약이 무너지고, 결국 개인의 자유도 위협받는다고 경고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이상적이면서도 실행 가능한 구체적 행동(투표, 토론, 법 제정)을 강조합니다. 반면, 크리슈나무르티의 철학은 내면의 성찰을 강조하지만, 그 성찰이 사회적 변화로 이어지는 구체적 경로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루소와 크리슈나무르티의 철학은 각각 소중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루소는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참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크리슈나무르티는 내면의 자유와 성찰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 둘을 균형 있게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내면적 각성은 개인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감을 줍니다. 하지만 그 각성이 현실의 책임과 단절된다면, 공허한 이상주의에 머물 위험이 있습니다. 루소의 말처럼, 투표를 비롯한 시민의 참여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투표는 단순히 한 표를 던지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가치와 신념을 현실에 반영하는 행동입니다.
예를 들어, 여성의 투표권이나 노동자의 권리는 철학적 성찰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는 수많은 시민의 투표와 투쟁을 통해 쟁취된 결과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철학이 이런 현실적 변화를 간과한다면, 루소의 시민 참여론은 그 변화를 가능케 하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내면적 자유를 추구하되, 루소의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내면의 성찰과 외부의 행동은 서로를 보완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듭니다. 투표소에서 한 표를 던지고, 지역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철학적 깨달음을 현실로 만드는 첫걸음입니다.
루소와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유와 사회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렌즈를 제공합니다. 루소는 투표와 참여를 통해 시민이 자유를 지키고 공동체를 만들어간다고 보았고, 크리슈나무르티는 내면의 각성만이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크리슈나무르티의 삶이 국가의 보호와 시스템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은 현실적 모순을 드러냅니다. 반면, 루소는 이상과 현실을 연결하며 시민의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투표를 하지 않는 자는 시민이기를 포기한다는 루소의 말은 오늘날에도 강렬한 울림을 줍니다. 우리의 작은 행동(투표, 토론, 참여), 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됩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내면적 자유를 꿈꾸되, 루소의 현실적 책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깨어 있는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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